
장쾌하게 솟아오른 바위산 위에 아홉 개의 웅덩이가 있다. 하늘을 비추고 수려한 바위가 내다보고 해와 달이 뜬다.
웅덩이 안에 있는 물은 여태껏 마른 적이 없다. 그래서 웅덩이가 있는 바위를 `신령암’이라 했다.
월출산 구정봉(九井峰, 해발 738m). 산에 오른 사람들 내남없이 감탄한다.
“허허, 아홉 개가 아녀. 여나무 개 돼”
“시암(샘)이 아홉 갠디, 왜 아홉 개냐 허믄, 용 아홉 마리가 산게 돌구멍도 아홉 개인 것이여.”
“허허, 아홉 개가 아녀. 여나무(여남은) 개 돼. 그런디 왜 구정봉이라 혔냐, 옛날에는 `9’가 많다는 뜻이여. 최고라는 뜻이여. `열시(열세) 개 봉’ `열다섯 개 봉’ 허는 말은 없어. 잡기헐 때 `8’은 `9’에 져도 `9’는 `10’에 안져. `10’은 도로 값아치가 없어져 불어.”
월출산 아래 도갑리 죽정마을. 백발 노인도 정자에 오르면 꾸벅 절을 하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마을. 뜬금없는 구정봉 얘기에 벌어진 설전도 쉬엄쉬엄 산 오르듯 느긋하다.
“땅에서 솟는 물이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물인디 왜 안 몰라(말라). 신성허니 모실라는 뜻으로 나온 얘기제.”
“고 물은 생전 몰르들(마르질) 안해. 내 평생 구정봉 물이 말라 불었더라는 사람을 못 봤어. 왜 그러냐 허믄, 밤에는 이슬이 적셔 주고 아침마다 안개가 적셔 주거든. 월출산은 함부로 보기 애로운(어려운) 산이여. 항시 구름이 껴 있거든.”
박찬원(80) 할아버지는 작년에 `마감’ 산행을 했다. 더 늙으면 못 올라갈 것 같아 결행했다. 내내 힘들었지만 능선에서 벗어나 있는 구정봉도 오르고, 한참이나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 구정봉 동석과 마애불도 돌아봤다.
“동석이 `딸깍바우’여. 근디 누가 통 안 밀었는가 내가 민게 `딸깍’ 움직이드라고. 한번 움직이고 나믄 안 움직이거든. 시간이 지나야 또 `딸깍’ 허제. 요 바우 따물로(때문에) `영암’이라고 허제. `신령한 바위’. 움직이는 신령한 바위가 시(세) 개가 있는디, 요 딸깍바우가 한나(하나), 천황봉 아래 한나, 한나는 아직 못 찾았다고 허든마.”
할아버지 말과 조금 다른 얘기도 있다. 움직이는 바위가 셋(삼동석) 있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이 동석 때문에 인물이 난다고 하여 몰래 바위들을 밀어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중 한 바위가 다시 산 위로 올라왔고 그것이 `딸깍바우’라는 것. 또 `동차진 전설’과 관련하여 구정봉 암반 자체를 삼동석이라고 한다. 비운에 죽고만 동차진이라는 사람이 이 봉에 사람이 오르면 `자기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세 번 움직인다는 것.
“떡본초(본초) 헐라고 무던히(퍽이나) 올라댕겼네”
“비 오는 그날 밤(비광)이 없네.”
남녀평등시대 따져, 8년 전 지었다는 `여자 정자’에는 할머니들 10원짜리 화투놀이가 정겹다.
한참을 앉아 있다보니 `털털, 빈털터리 되야불었다’는 홍성읍(83)·오정례(70) 할머니가 옛날 얘기를 들려준다.
“떡본초(본초) 헐라고 무던히(퍽이나) 올라댕겼네. 동지떡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올라댕겼는디. 거가 `미왕재’여. 갈대밭으로 해서 구정봉 올라댕긴 데가. 이불 보따리로 한나(한가득) 뜯어 갖고 왔는디.”
“항, 봄이믄 꼭 댕겼제. 바람 불믄 흐커니 뒤집어지는 것이 볼 만해. 그 놈 본초 말려 갖고 빠사(부셔) 갖고 찹쌀로 인절미를 허믄 떡이 떨어지들 안혀. 찰진께.”
하루가 멀다하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구정봉을 올라다닐 때가 있었다. 천황봉에는 `닥나무’가, 구정봉에는 `딱나무’가 많았다. 할머니들이 `딱나무’라 부르는 것은 `산닥나무’다.
“닥나무와 딱나무가 달러. 닥나무는 좋은 놈은 창호지 맹글고 안 좋은 놈은 짚허고 섞어 갖고 마분지 맹글고, 딱나무는 종우돈(지폐) 맹그는 것이여. 닥나무는 잎이 넓적넓적헌디, 딱나무는 나무도 안 크고 잎도 잘잘해. 여름에 꽃이 노라니 이뻐.”
“딱나무 껍딱 베껴 노믄 근으로 떠 갖고 정부에서 사가. 돈 맹글라고. 고놈 헐라고 올라댕겼제. 여름에 농사 짓음서(지으면서) 돈 쪼까 벌라고 가을 반까지 올라댕겼어. 구정봉 바우 밑에서 물이 난께, 거그서 싸 간 보리밥 묵고.”
힘들게 올라다닐 적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산을 오르내린 때도 있었다.
“경지정리험서 논이 생겼제. 옛날에는 순전히 밭이었어. 서숙(조) 갈아묵고 살았제. 숭년(흉년) 들믄 딴 디보다 더 애로와(어려워). 쑥 뜯어 갖고 쑥밥 쑥죽을 해묵는디, 동네 근방은 다 뜯어가 불고 없는께 산으로 올라가제. 산에도 순 나무 밑이라 얼마 없어. 묵어야 산께 뜯다 보믄 고개 넘어 강진까지 가서 해 오고 했어.”
`뻗친(피곤한) 줄도 모르고’ 올라다녔다. 집에 돌아오면 삭신이 다 녹아내렸다.
`좋은 시상(세상)’ 만나 산에 오를 일은 없어졌지만, 이제 남들처럼 구정봉 천황봉에 올라 사진 박고 놀다오고 싶다. 하지만 마음 뿐이다.
“하느님이 어쩌금(어쩌면) 바우들을 그라고(그렇게) 이삐게 올려놨는지, 요상한 것들이 쑤두룩해. 인자 틀려불었제. 우리가 모다(모터) 다 타버린 기계여. 8월 한가우달에, 온달에 각시들만 월대바우(마을 바로 뒷산 맨 위에 놓인 바위) 올라가서 강강술래 했는디 인자는 거기도 못 가. 밑에서 궁뎅이 밀어준다고 혀도 못 가.”
머릿속에서만 갈대밭이 자빠졌다(넘어졌다) 일어나고 천황봉 아래로 먼 산들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단다.
세상 모든 물줄기 예서 시작이라는 듯
구정봉에 오른다. 도갑사에 안겨 천년 세월 더트다 산길에 든다. 숲 우거져 짙은 나무 그늘 깔렸는데 벌레소리, 새소리, 여러 소리로 더 울창하다. 푸르름에 잠겨 발걸음 들떠 있다.
그러나 너른 길 끝나더니 계속되는 옴팡진 오르막길, 땅만 보고 오른다. 가다가다 주저앉아 “천만리 머나먼 길 어이 찾아갈꼬” 한다. 죽정마을 할메들 날마다 오르다시피한 그 길, 무릎 짚고 간다.
미왕재 올라서야 바람이 분다. 멀리 펼쳐진 산야, 맑고 아늑하다. 원추리가 피었다.
능선 따라 오르락내리락, 멀리 가까이 부려진 기암들과 눈맞추며 간다. 향로봉 올라서니 구정봉으로 뻗은 능선이 곰살궂다.
있다. 움푹 패인 웅덩이들. `오메!’ 허나, 일 년 열두 달 마르지 않는다는 구정봉 연못 안에 물이 없다. 그러다 바로 옆 커다란 바위에 올랐더니 `시상에!’ 있더라, 마르지 않은, 깊은 웅덩이, 세상 모든 물줄기 예서 시작이라는 듯, 산꼭대기 고요히 고여 있더라. `시상에’ 개구리 한 마리 얼굴 내밀고, 올챙이들 요리조리 헤엄쳐 다닌다. 다른 작은 웅덩이에도 물이 흐벅지다.
구정봉, 월출산의 장엄한 성곽이, 정교하게 쌓아올린 석탑이 여기서 다 보인다. 나는 듯, 뛰는 듯, 아귀찬 암봉들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다.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뢰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어느 시 구절이 절로 나온다.
구정봉 웅덩이는 `화강암의 마술’
그런데 구정봉의 웅덩이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전설부터 따져보자.
도갑리 죽정마을 어르신 말씀처럼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게 하나다. 다른 하나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디딜방아를 찧었던 자국. 또 하나는 영암 구림마을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한 장군의 유복자인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구멍이 생긴 것. 동차진은 금강산에 들어가 10년간 도술을 익혔으나 도술을 정당하게 쓰지 않고 자신의 만용을 부리는 데 쓰자, 옥황상제가 화를 막기 위해 아홉 번의 벼락을 내렸다 한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잠든 달 밝은 밤에 하늘의 아홉 선녀가 멱을 감았던 곳이라는 아름다운 얘기도 있다. 구림마을 땔나무하는 아이가 막내 선녀 옷 한 벌을 몰래 감춰 승천하지 못하고 둘이 오래오래 살았단다.
과학적으로 보면 월출산의 수려한 바위들은 `화강암의 마술’이다. 화강암은 1억6000∼7000만 년 전, 공룡이 살던 중생대에 마그마가 땅껍질인 지각(地殼)의 약한 틈 사이로 올라온 후 그대로 굳어진 암석. 수천 년의 지각운동과 풍화·침식 작용을 거쳐 지금의 거대하고 결곡한 바위가 드러난 것이다.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 등의 화강암은 약 1억5000만 년 전에, 월출산은 공룡시대가 끝날 무렵인 약 900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 월출산의 화강암 줄기는 영암에서 광주를 땅속으로 연결하고 있다 한다.
연못처럼 둥그렇게 패인 구정봉의 웅덩이는 화강암이 땅속에서 화학적 풍화(風化,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 암석이 부서져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즉 흙 모래가 되는 작용)가 계속되다 땅 위로 드러나며 빗물 등이 고여 풍화작용이 이어진 것. 암벽에 벌집처럼 파여 있는 것을 일반적인 `풍화혈’(風化穴, 타포니)이라 하고 구정봉의 웅덩이처럼 넓게 파인 구멍을 `가마솥구멍’(나마)이라 한다.
오호라, 이 달빛! 어여쁜 선녀 내려오시겄다
스르르 밤 깊어지고 달이 떠올랐다.
온산에 빛이 번진다. 둥근 보름달이다. 월출산의 밤은 이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별인지, 산속의 밤이 이토록 깊고 아늑한지 알려준다.
그 모든 벌레와 새들의 울음소리가 그친 밤, 구정봉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고요를 더한다. 이쪽 웅덩이와 저쪽 웅덩이에 사는 개구리가 장단을 잘 맞춰 노래한다.
구정봉 웅덩이에 달이 차분히 내려앉았다. 오호라, 이 달빛! 어여쁜 선녀 내려오시겄다. 땔나무하는 아이처럼 바위틈에 숨어 기다릴까. 땔나무하는 아이가 막내 선녀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팔(八)선녀가 내려오시려나.
글·사진=김창헌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