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아카이브
3가지가 유명한 그곳 영암에서 | |
도선국사 비각. 도선국사 비각. 사회학자인 엄기호 박사는 “길이 없으면 여행자는 난민이 된다”라고 했다. 사방팔방으로 뻗어 오히려 길의 과잉인 시대에 길이 없다는 말이 곧이 안들릴지도 모르지만 코로나를 겪으며 우리는 이렇게 길이 봉쇄당하는 황당한 일을 경험했다. 하지만 그뿐이 아니다. 대재앙의 시대 어느 곳이 격리 되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되돌아가거나 우회할 수밖에 없다. 전쟁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이보다 더 심한 길의 부재는 바로 심리적인 것이다. 육안의 길은 보이고 우리는 늘 사용함에도 그런 길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 “모든 길은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그것이 바로 길의 부재라는 것이다. 여암 신경준의 말처럼 “모든 길은 본디 주인이 없어서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라는 말 속에서 정답을 찾을 수 있다. 길 위에서 길 주변의 것들을 일일이 불러 호명해 주고 가는 여행자야 말로 진정한 길의 주인이며, 없는 길도 만들어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나의 여행은 그래서 늘 해찰로 초지일관한다. 길의 주인이 되기 위함보다 곁들에서 길을 옹위하는 존재감들과 교감하는 것이 좋아서 말이다. 죽정리 국장생. 죽정리 국장생. 2주전 이틀간의 영암으로 여행을 떠났다. 가장 큰 숙제는 도갑사 앞의 장생을 만나는 것이었다. 어느 책자에선가 보았던 이 나라 장승의 시원이라는 장생을 만나는 것이 어느덧 내 마음의 버킷 리스트에 들어와 있었다. 경기도의 엄미리에서, 충남의 탄천에서 화순의 동복에서 만나는 나무 장승이나 제주의 돌하르방 같은 남원 주천의 석장승, 나주 불회사, 운흥사의 석장승의 시원을 전문가들은 바로 도갑사와 경상도 양산 통도사의 장생 비에서 시원을 찾고 있다. 도선 숭의비. 도선 숭의비.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으로 대표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까지 등극한 장승의 역사를 천착하는 일은 일견 우스꽝스러울 수 있지만 그게 아니다. 모든 일은 연원이 있는 것이다. 그 뿌리를 찾는 것이 한없이 즐거운 그런 여행을 떠났다. 다행히 어느 블로그에 도갑사 앞 장생의 주소가 확실히 찍혀 있었다. 서울 사람같은데 전라도 사는 나도 못 찾아낸 장생의 위치를 정확히 담아내고 있었다. 먼저 도갑사 앞의 하루라는 찻집에 차를 두고 국장생을 만났다. 찻집 주차장에서 도갑사 방향으로 200미터를 들어가 모퉁이에 다듬어진 계단으로 오르니 네모진 화강석을 다듬어 놓은 것이 보인다. 도갑사의 숲길. 도갑사의 숲길. 엄격한 규율로 관리된 표식 일반적인 장승이 아니라 그 네모진 돌에 국장생(國長生)아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었다. 이렇게 표식이 되는 돌을 세우는 이유는 바로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불교국가인 고려에서 사찰은 엄격한 규율로 관리되었던 것의 방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영역 표식의 장생이 장승으로 변하며 잡귀와 잡신을 물리치는 역할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의 거리를 표시해주는 이정표 구실을 하는 용도로 점차 변모해왔던 역사를 이런 장생표가 입증하는 것이라 했다. 이런 귀중한 유산임에도 선뜻 알지 못하는 것에는 또 하나 대부분의 목적지가 바로 도갑사인지라 휑하니 지나칠뿐만 아니라 여기 국장생이 있다는 표식이 하나도 없는 것도 그 이유 일 것이다. 죽정리 국장생. 죽정리 국장생. 근 20여년간의 그리움을 이번 일견으로 마치기에는 아쉬움이 있어 내일 또 찾아 볼 것을 생각하고 도갑사 경내로 들어간다. 대웅전에는 이제 막 저녁 예불을 마친 스님이 문고리를 잠그고 계시다. 속으로 종교간의 갈등이 이제는 절집 내부까지 찾아 들어온 때문 아닌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인다. 대웅전에 들지 못한 것은 나의 게으름 탓임을 자책하며 산길을 따라 들어간다. 계곡을 따라 가면 이 절집을 창건한 도선국사와 조선시대에 중창한 수미왕사 두분을 기리는 비가 있다. 소전머리 황장생. 소전머리 황장생. 도선수미비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비는 웅장한 거북 형상을 한 용(비희라는 용으로 9종류의 용중에서 무거운 것을 좋아하는 용)이 짊어지고 있다. 무려 18년간에 걸친 공사로 만들어진 이 비인만큼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용이 제격아닌가 싶어진다. 총공사기간이 21년이라는 설명을 수없이 왔어도 이번에야 처음으로 깨닫게 된다. 그만큼 절의 건립과 중창에 대한 스님들의 애정이 강했을 터인데 게다가 이 나라 풍수지리의 비조라 일컷는 도선국사가 아닌가. 도갑사 경내. 도갑사 경내. 풍수지리의 비조 도선국사 도선국자와 이곳 도림마을 사람 최지몽 등으로 이어진 이 땅의 국토관을 훗날 이수광의 택리지로 이어지다 여암 신경준에 의해서 1대간 1정간 13정맥으로 체계화 되었다. 우리 선조들의 국토를 바라보는 관점은 날 것 그대로였다. 즉, 보여지는 산하의 모습을 따라 등 허리뼈를 대간으로 하고 거기에서 갈래로 나온 갈비뼈를 정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을 수탈하고 병합할 목적으로 고토 분지로라는 지리학자가 지질 자원을 통해 산맥의 체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산을 자르고, 물길을 자르며 우리의 정신까지 말살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광복이 되고 난 이후에도 우리는 그의 논법을 교과서에서 그대로 따라 배웠다. 도선국사만 생각하면 나는 고토 분지로를 떠올리며 분통을 터뜨린다. 2년도 채 안되는 동안에 왜곡해버린 한반도는 중국을 향해 있는 토끼 모양이라고 했다. 하지만 우리는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형국이라고 알고 있고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이어져왔던 것이다. 후쿠시마의 침출수로 극도로 예민해진 한반도의 상황에 나는 도선국사에 대한 한없는 경외감을 표시하며 물러 나온다. 남으로 흐르는 지세를 막기 위한 도선국사의 노력은 화순 운주사의 천불천탑과도 긴밀한 관계를 갖으며, 또 한편으로는 썩어가는 신라 조정을 향해 혁신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마음을 담아 와불을 세웠다는 이야기가 상기된다. 경내는 점차 노을에 물들며 황금빛으로 변해간다. 언젠가는 깊은 밤에 별빛이 흐르는 도갑사에서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벗하며 차한잔 마주할 날을 기대해 보며 숙소로 오는 길, 월출산의 환한 달이 우리를 쫓아온다. 기찬랜드와 월출산. 기찬랜드와 월출산. 새삼 느끼는 황장생의 위세 다음날 우리의 목적지 첫 번째는 황장생이다. 주소는 군서면 동구림리 433-3번지. 네비게이션을 신봉하고 마을 안으로 들어가니 길이 끊겨 있다. 인가는 있어도 사람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살피니 저기 철책이 보인다. 경작하지 않은 밭의 한가운데다. 풀이 더 우거진 계절에 왔다면 찾지 못하고 돌아설 수 있을 터인데 다행이다 싶다. 바위는 철분이 많은지 거무튀튀하게 변해있는데 그런 한면에 황장생이라고 쓰여 있다. 이 또한 국장생과 마찬가지로 황실이나 황제를 의미하는 뜻일 터이다. 도갑사라는 사찰의 격을 알게하고 한편으로는 절의 위세가 여기에 달했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껴 본다. 관리가 잘 안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며 길을 되돌아 이번에는 마지막 남은 국장생을 찾으러 간다. 그런 길 위에서 우리는 구림 마을을 만났다. 어차피 들러 보고 싶은 마을이었는데 싶어 차를 두고 하정웅 선생이 부모님의 고향인 영암에 기증한 미술작품과 이를 토대로 건립한 하정웅미술관을 먼저 둘러 보았다. 평생을 부지런하고 정직하게 살면서 모은 돈을 미술품 콜렉션에 할애하며 이 나라의 가난한 미술가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을 과감하게 광주시립미술관과 이곳 영암에 기증한 훌륭하신 분의 자취가 또렷하다. 미술관 내부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번에는 바로 옆 도기 박물관으로 간다. 이곳을 좀더 꼼꼼하게 볼 요량이었다. 토기와 도기와 자기라는 구분을 명확히 알기 위함이다. 하정웅 미술관 야외. 하정웅 미술관 야외. 오래전 화순 고인돌축제를 진행할 때 어린 학생들과 함께 흙을 말아올려 그릇 모양을 하고 노지에서 불을 때서 토기를 만든 경험이 생생하다. 온도를 재어보니 650도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이것을 식혀서 항아리를 손가락으로 튕겨보니 쇳소리 같은 것이 난다. 말캉한 흙일 때 느끼지 못한 질감들이 불을 통해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이런 토기를 만들었던 시대에서 점차 유약을 사용하고 노천소성이 아닌 가마에 구워내는 시대가 바로 도기의 시대라는 설명을 듣게 되었다. 유약의 발견은 도자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일인데 이런 유약을 처음 사용한 유적이 바로 영암에 있어서 “시유도기”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도기의 모양이 다채로울 뿐만 아니라 거기에 사용된 문양이 참으로 아름다웠다. 하나 하나 꼼꼼히 설명해주는 해설사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을 삽시간에 내것으로 저장했다. 오키나와산 멧돼지 도기. 오키나와산 멧돼지 도기. 도기의 생산지는 흙은 물론이요, 숲이 울창해야 뗄감을 잘 공급할 수 있다는 원칙, 더불어 이것을 공급하고 유통하려면 물길이 발달 되어야 한다는 것, 청자의 산지 강진이 그런 것처럼 이곳 영암의 구림쪽이 바로 적격지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이 상대포라는 국제 무역항이자 교류의 들목이었기 때문이다. 도기박물관의 특별전을 보니 오키나와에서 작업하는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이 또한 하정웅선생님의 콜렉션을 가지고 하는 것이었다. 생각이 점점 깊어진다. 우리 안의 고향에 대한 마음은 어디까지 일까 라는 의문이 꼬리를 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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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5-0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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