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아카이브
모든 것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곳 | |
영암의 세가지 보물 도기 박물관 앞 상대포에 섰다. 1981년 영산강 하구언이 둑으로 막아지면서 이곳은 이제 물길이 막혀 더 이상 포구가 아니다. 하지만 옛적 이곳이 포구였을 때에는 남도의 물산이 영산강 유역의 산길, 들길, 물길을 따라 한데 모였던 곳이다. 하니 왕실에 진상할 곡물과 산물이 모이는 곳일뿐만 아니라 대외무역의 전초기지 역할도 병행했던 곳이다. 우리가 아는 최치원이 공부를 위해 유학의 길을 떠난 것도 이곳이고, 무엇보다 왕인 박사가 일본에 한자와 유학을 전래하기 위해 배에 오른 곳도 여기이다. 그런 흔적이 이제는 인공의 호수로 남아있지만 왕인호라고 명명한 배가 줄에 매달려 있고, 이제는 져버린 꽃대신 잎새를 무성하게 떨구는 벚나무들이 줄지어있다. 상대포와 왕인호. 호수 전역을 도는데 한시간 가량이 걸린다. 특색이라 할 것은 없지만 왠지 역사에 기술된 그 분량이 없어서 소외당하는 왕인 박사와 관련한 부분처럼 마음 한구석이 애처러워진다. 다시 길을 나선다. 이번에는 마한의 역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54개의 소국으로 일러진 마한은 백제에 의해 복속되었다고 하지만 지역내에서는 그 세력권을 가지고 유지하고 발전해왔다는 설이 유력한 상황이다. 돌다리. 특히나 광주, 나주, 함평, 무안, 해남, 강진 등은 이런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천착해왔다. 금년에 국립마한역사문화센터의 유치와 관련하여 이런 도시간의 경쟁이 과열되었는데 최종으로 결정된 곳은 영암이었다. 나주에는 반남고분군 일원에 국립나주박물관이 자리한 터라서 영암으로 이어지면 그 축이 계속 남하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인 결정으로 예상되었다. 영암군 시종면 옥야리에 위치한 마한공원은 드넓은 땅에 관리동과 몽전이라는 발굴 유적을 경화하여 전시하는 공간, 남해의 뱃길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망루, 남해의 해신을 모신 남해신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남해신사의 해신. 마한국의 위세 물론 가장 핵심은 뒤편의 고분군이 있기 때문에 입지한 것이다. 잔디로 다듬어진 공원에는 파크 골프를 즐기는 분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라운딩을 즐기고 있다. 사실 필자는 골프에 대해 관심이 없는 탓에 그 놀이가 무엇인지 몰랐었는데 그날 유심히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쉽고 저렴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이 있어 보였다. 열심히 라운딩을 하는 분들 사이를 지나 꿈의 궁전, 몽전에 들어섰다.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이어가며 문화의 큰 자장을 형성했던 마한국의 위세가 대형 옹관을 비롯하여 출토 유물을 통해 드러난다. 고분들의 묘제가 변화해가는 양상들도 한눈에 배울 수 있고, 유물 자체가 상징하는 것들에 대해 다시 복기해 볼 수 있는 잇점이 있었다. 햇볕이 마음대로 들락 거리도록 투명 처리한 공간이 암울한 묘지가 아닌 문명의 시대를 바로 보도록 배려한 설계 아닌가 싶어 다시 그 공간을 한참 둘러 보았다. 지금은 물줄기가 잦아들어 과연 해상과 연이은 곳인가 싶을 정도의 상전벽해가 이뤄진 곳에 난데없는 망루에 올랐다. 드넓게 펼쳐진 시종면의 뜨락에 가만히 바닷물을 끌어 놓았다. 바로 대양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전진기지처럼 이곳이 보여졌다. 마한역사공원의 몽전. 육안으로 항해하던 시대의 구릉과 산지가 나침반이 되어 저 앞 목포구 앞바다의 시야바다를 지나 비금 도초를 지나면 곧장 외해가 나온다. 좀 더 나가면 우이도와 흑산도, 홍도가 그리고 이제 중국과 일본으로 당도하게 되는 시작점이 된다. 그런 상상을 하며 다시 기와로 번듯하게 자리잡은 남해신사로 걸음을 옮긴다. 3가지가 시리즈로 유명하다는 제목을 달았으니 그 답중의 하나가 여기있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는 서해와 동해와 남해에 용왕신을 모시고 바다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제를 지냈다. 마치 산악에서 5악을 두고 제를 지냈듯이 바다에 제를 지내는 풍습은 고래로부터 전해왔다. 서해에는 황해도 풍천의 서해신사. 강원도 양양의 동해묘와 함께 영암의 남해신사가 자리한 것이다. 전해지는 얘기로는 고려의 현종이 거란의 침입에 따라 피난을 오며 이곳 남해포에 이르렀을 때 물길이 막혀 오가도 못할 긴박한 상황이었을 때 꿈에 남해의 신이 나타나 지금 바로 피하라는 말을 듣고 나와보니 물길이 썰물이라 강을 건널 수 있어 살아났다고 한다. 그 후 자신을 구해준이가 바로 남해의 용왕이라 알고 사당을 세우고 인근 6개현의 수장이 와서 제를 지내게 하며 남해신사가 탄생했다는 설이다. 문헌에는 이런 사실이 조선시대에서야 나타나고, 실제 발굴에서도 그 시대를 앞서가는 유물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 지역의 역사연구자들은 훨씬 이전에 그곳이 제사를 지냈던 장소라고 주장한다. 남해신사. 직접 참관한 남해신사 이번 여행기를 쓰는 동안 남해신사에서 제가 있어 직접 참관을 했다. “남해신사 제례 보존위원회와 해양문명원, 무등공부방” 등에서 진행하는 제례에서 수신을 가장 접점에 모시고, 여신인 마고를 새로 봉안하는 행사를 보면서 새삼 이 나라의 전통의례와 그 맥락들을 전승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이기도 했다. 대한민국 해안 영토의 태반이 간척이나 호안 개발을 통해 지도가 변해가면서 옛적의 국토관을 상실해 버리는 안타까움과 더불어 생태계의 자궁과 같은 갯벌을 잃어버리는 것이 안타까움으로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해발 고도 20미터도 안되는 곳에 터전을 잡은 사람들이 영암 사람들이니 이들에게 해발 809미터의 월출산은 그야말로 신성함 그 자체였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설악산, 주왕산과 함께 월출산은 한국의 3대 암산으로 불리워진다. 온통 황톳빛으로 물든 뜨락에 암괴로 차오른 월출산이 갖는 신성성은 다른 여느 산보다 남달랐을 터이고, 여기에 남해신사까지 함께 있으니 영험함은 당연히 갖춘 것 아닌가 그래서 다른 산들이 천왕봉이라 말할 때 월출산만이 오직 천황봉이라 칭할 수 있는 것 이라 여겨졌다. 차를 타고 다시 이번에는 덕진면의 차밭으로 간다. 호남의 3대 차밭이라 하면 보성의 차밭, 강진 성전의 차밭, 그리고 이곳 덕진의 차밭을 꼽을 수 있다. 여러번 찾고 싶었지만 이번 여행길에 쉽게 들릴 수 있어 좋았다. 덕진의 차밭. 영암의 3가지 보물 가파른 산사면에서 구릉으로 변하는 지점에 자리한 차밭은 가파르지 않고, 그렇다고 평지도 아니어서 완만한 웨이브가 마치 이 나라 남쪽의 산지붕과 닮아 좋았다. 싱그러운 차밭을 거닐며 간혹 꿩들이 푸드득 날아가는 모습이 봄철 차를 딸 때만 분주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내맡겨두는 헐렁함도 느껴졌다. 이 차밭을 밑자락으로 삼고 저 멀리 월출산을 보면 그 중간에 영암읍내가 걸린다. 읍내에 안개가 끼어 있으면 그야말로 세 개의 세상이 열린다. 하나는 차를 마시는 도인의 세계라면 안개 아래에 잠든 인간의 세계, 그리고 저 운무 가득한 신선의 세계인 월출산, 이 또한 영암의 3가지 보물 아닌가 싶어졌다. 몽전의 마한유적. 차를 타고 이번에는 영보정 마을로 간다. 영보정이라는 마을의 정자가 구심이 되어 마을의 동계와 향약이 발달돼 전국의 귀감이 되었다는 그곳이다. 잘 보존된 마을다움을 느끼며 눈길은 그 아래에 있는 농협종묘센터의 유리 온실로 향해진다. 남도의 온갖 종묘를 키우던 시설이 폐쇄되어 이제 누군가 용도에 맞게 구매해주길 바라는 상황이라고 한다. 그렇지 이런 공간을 식생의 부활의 공간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인간이 지구를 파먹기 시작한 시기라는 인류세의 세기에 조금이라도 자연을 생각하고 되돌려주고 미안해하는 공간이 대한민국에 하나 들어서도 되지 않을까 라는 미안함과 욕심이 교차한다. 인접한 장암정까지 들린 후 이제 영암행의 마지막 코스를 향한다. 다소간의 긴장감이 도는 그곳은 바로 쌍계사지 석장승이 있는 곳이다. 나주에서 영암으로 들어서는 경계지점 국도 양켠에 덩그라니 서 있는 장승을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바로 쌍계사의 돌장승을 복제하여 둔 것이다. 크기 마저도 비슷하게 세워 두었는데 이 출처가 금정면의 옛 절터이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영보정. 변하지 않는 터무니 간직한 고장 서울 인사동 들목에 서 있던 장승이 나주 불회사의 석장승이었는데, 영암사람들은 쌍계사의 석장승을 마을의 관문에 세웠다. 중절모를 쓴 장승이 있는 그곳은 국사봉 중턱에 위치한다. 산길을 가야하는데 처음 이 장승을 만난 것이 1999년 겨울이었다. 그리고 두해 뒤인 2001년 봄과 여름 사이에 찾아갔다가 길을 잃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풀들이 우거져 도저히 전진을 못할 상황에서 못만난 장승을 그리워하다 22년만에 다시 가는 길이다. 아. 말끔히 제초작업이 되어 있다. 폐사지를 오르는 내내 길이 말끔해서 혹여 내가 다른 길을 가고 있나 착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가길 15분만에 나는 국사봉과 쌍계사터를 지키며 영암의 안녕을 기원하는 주장군과 당장군을 알현할 수 있었다. 주장군은 그 매서운 눈망울과 음영의 표현이 남성과 같고, 당장군에게서는 운흥사나 불회사의 포근하고 후덕한 할매 장승의 느낌을 받게 된다. 실로 오랜만의 조우가 감격스러워 나는 사진을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담아내며 한참을 그 주변에서 서성거렸다.그리고 내친김에 절 터 쪽에 가 보니 예전 천연 돌다리가 아직도 건재하게 이곳이 피안의 세계임을 입증하듯 서 있는 모습을 우두커니가 되어 바라보았다. 영암, 모든 것이 변화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터무니를 간직한 고장이 분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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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 2025-07-24 |
관리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