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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영암

“고 물은 생전 몰르들 안해”
내용

산꼭대기에 아홉 우물, 월출산 구정봉

▲ 구정봉 웅덩이 안에 달빛이 머금었다

 장쾌하게 솟아오른 바위산 위에 아홉 개의 웅덩이가 있다. 하늘을 비추고 수려한 바위가 내다보고 해와 달이 뜬다.

 웅덩이 안에 있는 물은 여태껏 마른 적이 없다. 그래서 웅덩이가 있는 바위를 `신령암’이라 했다.

 월출산 구정봉(九井峰, 해발 738m). 산에 오른 사람들 내남없이 감탄한다.

 

 “허허, 아홉 개가 아녀. 여나무 개 돼”

 “시암(샘)이 아홉 갠디, 왜 아홉 개냐 허믄, 용 아홉 마리가 산게 돌구멍도 아홉 개인 것이여.”

 “허허, 아홉 개가 아녀. 여나무(여남은) 개 돼. 그런디 왜 구정봉이라 혔냐, 옛날에는 `9’가 많다는 뜻이여. 최고라는 뜻이여. `열시(열세) 개 봉’ `열다섯 개 봉’ 허는 말은 없어. 잡기헐 때 `8’은 `9’에 져도 `9’는 `10’에 안져. `10’은 도로 값아치가 없어져 불어.”

 월출산 아래 도갑리 죽정마을. 백발 노인도 정자에 오르면 꾸벅 절을 하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는 마을. 뜬금없는 구정봉 얘기에 벌어진 설전도 쉬엄쉬엄 산 오르듯 느긋하다.

 “땅에서 솟는 물이 아니고 하늘에서 떨어진 물인디 왜 안 몰라(말라). 신성허니 모실라는 뜻으로 나온 얘기제.”

 “고 물은 생전 몰르들(마르질) 안해. 내 평생 구정봉 물이 말라 불었더라는 사람을 못 봤어. 왜 그러냐 허믄, 밤에는 이슬이 적셔 주고 아침마다 안개가 적셔 주거든. 월출산은 함부로 보기 애로운(어려운) 산이여. 항시 구름이 껴 있거든.”

 박찬원(80) 할아버지는 작년에 `마감’ 산행을 했다. 더 늙으면 못 올라갈 것 같아 결행했다. 내내 힘들었지만 능선에서 벗어나 있는 구정봉도 오르고, 한참이나 내려갔다 다시 올라와야 하는 구정봉 동석과 마애불도 돌아봤다.

 “동석이 `딸깍바우’여. 근디 누가 통 안 밀었는가 내가 민게 `딸깍’ 움직이드라고. 한번 움직이고 나믄 안 움직이거든. 시간이 지나야 또 `딸깍’ 허제. 요 바우 따물로(때문에) `영암’이라고 허제. `신령한 바위’. 움직이는 신령한 바위가 시(세) 개가 있는디, 요 딸깍바우가 한나(하나), 천황봉 아래 한나, 한나는 아직 못 찾았다고 허든마.”

 할아버지 말과 조금 다른 얘기도 있다. 움직이는 바위가 셋(삼동석) 있었는데 중국 사람들이 이 동석 때문에 인물이 난다고 하여 몰래 바위들을 밀어 떨어뜨렸다. 그런데 그 중 한 바위가 다시 산 위로 올라왔고 그것이 `딸깍바우’라는 것. 또 `동차진 전설’과 관련하여 구정봉 암반 자체를 삼동석이라고 한다. 비운에 죽고만 동차진이라는 사람이 이 봉에 사람이 오르면 `자기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세 번 움직인다는 것.

 

 “떡본초(본초) 헐라고 무던히(퍽이나) 올라댕겼네”

 “비 오는 그날 밤(비광)이 없네.”

 남녀평등시대 따져, 8년 전 지었다는 `여자 정자’에는 할머니들 10원짜리 화투놀이가 정겹다.

 한참을 앉아 있다보니 `털털, 빈털터리 되야불었다’는 홍성읍(83)·오정례(70) 할머니가 옛날 얘기를 들려준다.

 “떡본초(본초) 헐라고 무던히(퍽이나) 올라댕겼네. 동지떡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올라댕겼는디. 거가 `미왕재’여. 갈대밭으로 해서 구정봉 올라댕긴 데가. 이불 보따리로 한나(한가득) 뜯어 갖고 왔는디.”

 “항, 봄이믄 꼭 댕겼제. 바람 불믄 흐커니 뒤집어지는 것이 볼 만해. 그 놈 본초 말려 갖고 빠사(부셔) 갖고 찹쌀로 인절미를 허믄 떡이 떨어지들 안혀. 찰진께.”

 하루가 멀다하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구정봉을 올라다닐 때가 있었다. 천황봉에는 `닥나무’가, 구정봉에는 `딱나무’가 많았다. 할머니들이 `딱나무’라 부르는 것은 `산닥나무’다.

 “닥나무와 딱나무가 달러. 닥나무는 좋은 놈은 창호지 맹글고 안 좋은 놈은 짚허고 섞어 갖고 마분지 맹글고, 딱나무는 종우돈(지폐) 맹그는 것이여. 닥나무는 잎이 넓적넓적헌디, 딱나무는 나무도 안 크고 잎도 잘잘해. 여름에 꽃이 노라니 이뻐.”

 “딱나무 껍딱 베껴 노믄 근으로 떠 갖고 정부에서 사가. 돈 맹글라고. 고놈 헐라고 올라댕겼제. 여름에 농사 짓음서(지으면서) 돈 쪼까 벌라고 가을 반까지 올라댕겼어. 구정봉 바우 밑에서 물이 난께, 거그서 싸 간 보리밥 묵고.”

 힘들게 올라다닐 적 생각하며 `한숨’을 내쉰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산을 오르내린 때도 있었다.

 “경지정리험서 논이 생겼제. 옛날에는 순전히 밭이었어. 서숙(조) 갈아묵고 살았제. 숭년(흉년) 들믄 딴 디보다 더 애로와(어려워). 쑥 뜯어 갖고 쑥밥 쑥죽을 해묵는디, 동네 근방은 다 뜯어가 불고 없는께 산으로 올라가제. 산에도 순 나무 밑이라 얼마 없어. 묵어야 산께 뜯다 보믄 고개 넘어 강진까지 가서 해 오고 했어.”

 `뻗친(피곤한) 줄도 모르고’ 올라다녔다. 집에 돌아오면 삭신이 다 녹아내렸다.

 `좋은 시상(세상)’ 만나 산에 오를 일은 없어졌지만, 이제 남들처럼 구정봉 천황봉에 올라 사진 박고 놀다오고 싶다. 하지만 마음 뿐이다.

 “하느님이 어쩌금(어쩌면) 바우들을 그라고(그렇게) 이삐게 올려놨는지, 요상한 것들이 쑤두룩해. 인자 틀려불었제. 우리가 모다(모터) 다 타버린 기계여. 8월 한가우달에, 온달에 각시들만 월대바우(마을 바로 뒷산 맨 위에 놓인 바위) 올라가서 강강술래 했는디 인자는 거기도 못 가. 밑에서 궁뎅이 밀어준다고 혀도 못 가.”

 머릿속에서만 갈대밭이 자빠졌다(넘어졌다) 일어나고 천황봉 아래로 먼 산들이 너울너울 춤추고 있단다.

 

 세상 모든 물줄기 예서 시작이라는 듯

 구정봉에 오른다. 도갑사에 안겨 천년 세월 더트다 산길에 든다. 숲 우거져 짙은 나무 그늘 깔렸는데 벌레소리, 새소리, 여러 소리로 더 울창하다. 푸르름에 잠겨 발걸음 들떠 있다.

 그러나 너른 길 끝나더니 계속되는 옴팡진 오르막길, 땅만 보고 오른다. 가다가다 주저앉아 “천만리 머나먼 길 어이 찾아갈꼬” 한다. 죽정마을 할메들 날마다 오르다시피한 그 길, 무릎 짚고 간다.

 미왕재 올라서야 바람이 분다. 멀리 펼쳐진 산야, 맑고 아늑하다. 원추리가 피었다.

 능선 따라 오르락내리락, 멀리 가까이 부려진 기암들과 눈맞추며 간다. 향로봉 올라서니 구정봉으로 뻗은 능선이 곰살궂다.

 있다. 움푹 패인 웅덩이들. `오메!’ 허나, 일 년 열두 달 마르지 않는다는 구정봉 연못 안에 물이 없다. 그러다 바로 옆 커다란 바위에 올랐더니 `시상에!’ 있더라, 마르지 않은, 깊은 웅덩이, 세상 모든 물줄기 예서 시작이라는 듯, 산꼭대기 고요히 고여 있더라. `시상에’ 개구리 한 마리 얼굴 내밀고, 올챙이들 요리조리 헤엄쳐 다닌다. 다른 작은 웅덩이에도 물이 흐벅지다.

 구정봉, 월출산의 장엄한 성곽이, 정교하게 쌓아올린 석탑이 여기서 다 보인다. 나는 듯, 뛰는 듯, 아귀찬 암봉들 야단스럽기도 야단스럽다. `하늘에 치밀어 무슨 일을 아뢰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굽힐 줄 모르는가?’ 어느 시 구절이 절로 나온다.

 

 구정봉 웅덩이는 `화강암의 마술’

 그런데 구정봉의 웅덩이는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전설부터 따져보자.

 도갑리 죽정마을 어르신 말씀처럼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게 하나다. 다른 하나는 신라 때 도선국사가 당나라에 보복하기 위해 디딜방아를 찧었던 자국. 또 하나는 영암 구림마을에 유배되어 내려와 살던 한 장군의 유복자인 `동차진’이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벼락을 맞아 죽을 때 구멍이 생긴 것. 동차진은 금강산에 들어가 10년간 도술을 익혔으나 도술을 정당하게 쓰지 않고 자신의 만용을 부리는 데 쓰자, 옥황상제가 화를 막기 위해 아홉 번의 벼락을 내렸다 한다. 그리고 삼라만상이 잠든 달 밝은 밤에 하늘의 아홉 선녀가 멱을 감았던 곳이라는 아름다운 얘기도 있다. 구림마을 땔나무하는 아이가 막내 선녀 옷 한 벌을 몰래 감춰 승천하지 못하고 둘이 오래오래 살았단다.

 과학적으로 보면 월출산의 수려한 바위들은 `화강암의 마술’이다. 화강암은 1억6000∼7000만 년 전, 공룡이 살던 중생대에 마그마가 땅껍질인 지각(地殼)의 약한 틈 사이로 올라온 후 그대로 굳어진 암석. 수천 년의 지각운동과 풍화·침식 작용을 거쳐 지금의 거대하고 결곡한 바위가 드러난 것이다. 금강산, 설악산, 북한산 등의 화강암은 약 1억5000만 년 전에, 월출산은 공룡시대가 끝날 무렵인 약 9000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 월출산의 화강암 줄기는 영암에서 광주를 땅속으로 연결하고 있다 한다.

 연못처럼 둥그렇게 패인 구정봉의 웅덩이는 화강암이 땅속에서 화학적 풍화(風化, 바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큰 암석이 부서져서 바람처럼 사라지는, 즉 흙 모래가 되는 작용)가 계속되다 땅 위로 드러나며 빗물 등이 고여 풍화작용이 이어진 것. 암벽에 벌집처럼 파여 있는 것을 일반적인 `풍화혈’(風化穴, 타포니)이라 하고 구정봉의 웅덩이처럼 넓게 파인 구멍을 `가마솥구멍’(나마)이라 한다.

 

 오호라, 이 달빛! 어여쁜 선녀 내려오시겄다

 스르르 밤 깊어지고 달이 떠올랐다.

 온산에 빛이 번진다. 둥근 보름달이다. 월출산의 밤은 이 지구가 얼마나 아름다운 별인지, 산속의 밤이 이토록 깊고 아늑한지 알려준다.

 그 모든 벌레와 새들의 울음소리가 그친 밤, 구정봉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고요를 더한다. 이쪽 웅덩이와 저쪽 웅덩이에 사는 개구리가 장단을 잘 맞춰 노래한다.

 구정봉 웅덩이에 달이 차분히 내려앉았다. 오호라, 이 달빛! 어여쁜 선녀 내려오시겄다. 땔나무하는 아이처럼 바위틈에 숨어 기다릴까. 땔나무하는 아이가 막내 선녀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니 팔(八)선녀가 내려오시려나.

글·사진=김창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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